ROADS TRIP IN EUROPE(5)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아름다운 코모 호수
ROAD TRIP
ROADS TRIP IN EUROPE(5)
토리노에서 피아트 500 트윈에어를 인수받은 곳은 린고토에서 조금 떨어진 피아트 공장이었다. 란치아를 비롯한 피아트의 소형차를 생산하는 이 공장은 규모가 상당했으며, 담당 직원은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친절히 우리를 배웅했다. 토리노를 떠나 모데나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한가했다. FCA의 협조로 이틀간 타게 된 피아트 500 트윈에어 컨버터블은 이탈리아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렸다.
작지만 열심히 씽씽 달리는 피아트 500은 모데나를 거쳐 밀라노까지 우리와 여정을 함께 했다. 처음에 피아트 500이 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실망했다. 원래는 알파로메오 줄리에타나 미토를 신청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유럽 출장길에 매번 알파로메오를 렌터카로 신청하지만 단 한 번도 배정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피아트 500 트윈에어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3기통이 이 정도면 꽤 잘 달린다’라고 생각했는데, 트윈에어가 2기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모데나에서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고 밀라노로 이동할 때도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피아트 500 트윈에어는 연료통이 작아 중간에 주유를 두 번 정도 했다. 0.9L의 작은 엔진은 고속도로 주행에서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다. 워낙 과속을 즐기는 운전들이 많다 보니 1차선은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순발력과 연비가 좋은 편이라 밀라노 시내 골목골목을 누비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오래된 도시라 좁은 골목과 애매한 주차공간에서 피아트 500의 작은 차체가 이점이 많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들어선 밀라노 입구는 생각보다 무질서한 편이다. 주로 서민들이 사는 구역이라 그런지 차들이 빽빽하게 주차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오래된 도시의 낡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호텔은 중앙역에서 가까운 곳에 잡았다. 무료 주차장이 있는 호텔을 찾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구글맵에서 지원되는 내용도 매우 적었고 호텔 예약 관련 앱도 거의 없던 시절이라 정보가 많지 않았다. 적당한 가격에 동선을 고려해 결정한 호텔은 시설은 괜찮았지만 주차장은 옆 건물을 이용해야 했다. 하루 이용 요금은 약 25유로 정도였다.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주변을 돌아보니 밀라노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도시였다. 도시 구성 자체가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많고 사람들도 꽤나 북적였다. 중앙역까지는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으며 음식점이나 백화점도 근처에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해결하려 역 근처에서 들른 일식집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주문을 하려고 일본어로 물어보니 사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중국인이어서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탈리아 음식점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미식을 즐기는 문화 때문인지 몰라도 일반적인 식당(트라또리아 trattoria)를 비롯해 정찬을 즐길 수 있는 리스또란테(ristorante), 간단한 주류와 안주를 먹을 수 있는 오스떼리아(osteria), 피자집인 핏제리아(pizzeria), 빵이나 디저트를 파는 빠넷떼리아(panetteria)와 빠니삐치오(panificio) 등으로 나뉜다. 이 외에도 젤라또 전문점, 로스트 구이 전문점, 포카치아 전문점, 카페테리아 등 음식점 구분 정도만 알고 있어도 다양한 음식을 큰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다.
다음 날은 밀라노의 상징인 두오모 성당에 잠시 들렀다가 시승차를 반납하러 외곽의 피아트 서비스센터로 이동했다. 시내 도로는 생각보다 좁아 왜 이탈리아 사람들이 순발력 좋은 작은 차를 선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교통 체계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운전자들은 성격이 매우 급하다. 물론 횡단보도와 보행자, 자전거 같은 교통약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고 여유가 있지만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게 친절과 자비란 없었다. 밀라노 시내의 교통체증을 뚫고 도착한 밀라노 피아트는 피아트, 란치아, 알파로메오 서비스센터였다. 도시 외곽이다 보니 근처에는 피아트를 제외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워크숍도 있었다.
인연 없는 알파로메오 대신 메르세데스 벤츠
500을 반납하고 예약한 렌터카를 인수하러 중앙역 근처를 찾았다. 한국에서 예약한 차는 알파로메오 줄리에타였는데 인기 차종이다 보니 역시나 다른 차로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운 좋게도 비슷한 등급의 차들이 모두 마감되어 한국에서는 아직 판매전인 페이스리프트 버전의 메르세데스 벤츠 E 클래스(9세대)가 배정되었다. 유럽의 렌터카 회사들은 사무실과 차를 인수받는 장소가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이용했던 렌터카 사무실 역시 밀라노 중앙역 부근의 좁은 골목 안에 사무실이 있었고 한참을 걸어가 사설 주차장에서 인수받았다. 같은 가격에 운이 좋게 등급이 올랐지만 밀라노에서 벤츠는 득보다 실이 많은 차종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E 클래스 같은 큰 차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도로 환경 자체가 소형차에 적합했다. 특히 차종이 차종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차털이의 표적이 될 수 있어 유료 주차장을 이용했는데 대부분 진입로가 좁아 주차에 애를 먹었다.
이탈리아에서 마지막 일정은 체르노비오의 코모 호수에서 열리는 콩코르소 델레간차였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이벤트인 콩코르소 델레간차는 매년 5월 코모 호수의 고급 리조트인 빌라 데스테에서 열린다. 현재는 코로나 상황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난 2019년까지 이 이벤트는 첫손에 꼽히는 클래식카 이벤트였다. 밀라노에서 체르노비오까지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해 약 1시간.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정겨운 이탈리아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코모 호수는 스위스 국경과 매우 가깝다. 길을 잘못 들면 바로 국경까지 가게 되며 차를 돌리기도 애매하다. 코모 호수 입구는 늘 방문객의 차로 붐비는데 밀리는 구간을 피해 조금 더 올라가 반대로 내려오려다 낭패를 보기도 했다.
스위스 국경 지대 부근에 있는 코모 호수는 얼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며 일 년 내내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이다. 고급 리조트와 조지 클루니 같은 헐리우드 유명 배우나 셀러브리티들이 소유한 별장이 호수 주변에 산재해 있으며 요트 정박장에는 고급 요트로 가득하다.
콩코르소 델레간차가 열리는 공간은 위쪽의 빌라 데스테와 아래쪽의 빌라 에르바 두 곳이다. 이중 빌라 데스테는 콩코르소 델레간차에 출품한 모든 차들이 전시되는 공간이며, 빌라 에르바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RM소더비 경매장이다. 빌라 데스테의 전시차도 훌륭하지만 경매를 위해 대기 중인 빌라 에르바의 전시차를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랄프 로렌이 직접 부가티를 설명해 주다!
빌라 데스테에는 별도의 주차 공간이 없다. 대부분은 아랫동네에 있는 유료 주차장을 이용하고 빌라 데스테까지 약 2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누군가에는 불편할 수 있지만 동네 구경이 생각보다 재미있다. 오래된 마을을 관통하는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는 선술집과 음식점, 고서점, 각종 소품을 판매하는 가게들로 즐비하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물가는 비싼 편이지만 이곳 상점들의 역사가 생각보다 깊어 기념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틀에 걸쳐 열리는 콩코르소 델레간차는 연대 별로, 자동차 메이커 별로 꾸며진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1975년 이전에 제작된 차들이 전시되는데, 세계적인 부호들과 클래식카 컬렉터들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자가 방문했던 2013년의 토픽은 단연 랄프 로렌의 부가티 타입 57SC 아틀란틱 쿠페였다. 현재 4대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이 차는 450억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외에 란치아 시빌로, 람보르기니 350GT, 페라리 250 시리즈, 마세라티 A6G, 재규어 XKSS 등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차들을 실제로 볼 수 있다.
바리케이드는 전혀 없고 대부분은 오너가 직접 차를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다. 책에서나 보던 부가티 타입 57SC 아틀란틱 쿠페를 구경하고 있을 때 백발에 검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다가와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직접 차를 설명해 주면서 운전석도 보여 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대표인 랄프 로렌이었다. 워낙에 패션 쪽에 관심이 없다 보니 벌어진 촌극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필자에게 차를 설명해 준 사람들 중에는 세계적인 유명인이 꽤 있었을 것이다.
빌라 데스테의 가장 안쪽에는 페라리와 마세라티 로드스터가 자리를 잡았다. 중간에 비가 내렸는데 이 귀한 차들을 커버로 덮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빗줄기가 조금 굵어지자 열려진 톱 사이에 대충 우산을 걸쳐 놓은 게 전부. 혹시나 해서 귀한 차들의 가죽 내장재가 젖어 손상되지 않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예상 밖이다. ‘세월을 머금은 차들이라 자연적인 손상도 이 차의 일부입니다’ 페라리 250 오너가 웃으며 대답한 내용이다.
오전 전시 일정이 끝나면 심사를 위한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잔디밭과 빌라 데스테 곳곳에 전시된 차들이 직접 움직이며 심사대 앞을 지나가는 퍼레이드는 콩코르소 델레간차의 백미이다. 참석자들은 자신의 차를 직접 운전해 심사대 앞에 잠깐 멈추고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차의 생산 연도에 맞는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일부는 할아버지부터 손녀까지 가족이 모두 탑승하기도 했다. 여러 항목별로 점수를 집계해 시상도 하는데, 랄프 로렌의 부가티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빌라 데스테의 일정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는 빌라 에르바에 들러 RM소더비 경매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경매 과정이나 경매 참여는 제한된 자격을 가진 사람만 해당된다. 그러나 경매 진행 전 출품차들을 둘러보는 것은 가능했다. 페라리나 재규어 XJ220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성능 스포츠카부터 고전적인 클래식카까지 다양한 차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빌라 에르바에서는 전문 경매 브로커나 경매 물품 대리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근처에서 출품차를 직접 시승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시승을 위한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로웠으며(구입 가능 고객 대상이니 당연한 일이다) 조수석에는 무장한 보안요원이 동승한다.
코모 호수에서 꿈같은 하루를 보내고 밀라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누군가 추천해 준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 방법인 내비게이션을 끄고 한 시간 주행하기를 해봤다. 구글맵에 의지하지 않은 채 이름 모를 국도를 타고 이탈리아 시골 동네를 떠돌았다. 세계적인 부호들이 모여 있는 고급 리조트와 달리 사람 사는 곳 같은 순박한 시골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디를 가도 친절한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 승차감은 별로지만 나름 운치가 있는 벽돌 길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순간순간이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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